내가 여자로 태어났다면...

내가 여자로 태어났다면...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세상을 증오하면서 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모르긴 몰라도 최소한 여자들의 입장에서, 현대사회의 시스템은 아직까지도 철저한 '약육강식'이다. 이성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은 유명무실을 넘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으며, 약한 자는 오직 약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탐욕스런 강자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젖을 먹고, 누이들과 뛰어놀며 구김살 없는 유년기를 보냈다. 어른이 돼서는 내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달콤한 여자친구도 만났다.

...너무 행복하게만 살아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 자신에게 있어서만큼은 지난 30여년의 세월, '여자'가 있어서 행복했다. 나는 내가 아는 여자들은 물론이요 모르는 여자들이라 할지라도 내게 특별한 악감정만 없다면 언제든지 감사의 인사를 드릴 용의가 있다. '여자'는 그 존재 자체로 세상을 부드럽게 해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악녀'도 무지하게 많다고들 하는데, 나는 여지껏 짜증이 날 만큼 내게 스트레스를 주거나 하는 여성은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하여튼 나는 여자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서 언제고 좋은 감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이런 착하고 유순한 사람들을..자기보다 힘이 없다는 이유로 악마처럼 능욕하는 남정네들이 있다.

...TV 뉴스를 통해 성범죄 소식이 보도가 될 때마다 나는 치가 떨린다. 도대체 남자라는 후레자식들은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는 분노에서부터...정말 인류는 저런 끔찍한 범죄로부터 영원히 해방될 수 없는 것일까 하는 두려움까지... 

언제고 성범죄의 대상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는 이 세상 30억의 여성들...나는 궁금하다. 그들은 세상이 이렇게 불안하고 공포스러운데도 어떻게 하루하루를 잘 이겨내는 것일까.

만일 내가 여자였다면...

여성분들껜 미안하지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루하루의 불안감과 공포... 너무 과대망상 하는 것일까?

언제였더라. 한국에서 생활하는 필리핀 여성들의 신체적 안전을 위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동분서주하는 한 필리핀 외교관이 있어 신문과 방송에 크게 한번 회자가 됐던 적이 있었다. 이름이 기억이 잘 안나는데 여튼 주한 필리핀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그 사람은, 한국으로 시집와 한국인 남편에게 상습적인 폭행을 당하는 필리핀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 썼다. 마치 내 여동생, 내 누나를 보호 하듯이 그 외교관은 한국인 남편들을 향해...분노섞인 호통과 함께 서릿발 같은 접근 금지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피해자들을 대사관으로 모셔 위로의 말씀을 전한 뒤 차분하게 차후 절차를 밟아갔다.

외교관으로서의 본분은 물론이요 주위 조건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약한 자를 끝까지 보호해내는 그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이라...당시 방송과 신문에서 이래저래 회자가 많이 됐었다. 근무태만과 갖은 비리로 얼룩진 외국 주재 한국 대사관 직원들과 아주 보기 좋은 대조를 이루는 장면이라 하여...그 필리핀 외교관을 대하는 한국인들의 성원도 꽤 컸다.

그때 나는 대략 고등학생 정도가 아니었나 싶은데...이 세상의 남자들이 모두 다 저런 모습이라면 세상이 참 살기 좋을 것인데 라는 행복한 생각을 했었다.

우리는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에 가서 겪게 되는 갖가지 피해들을, 웬만해선 그냥 당연시 해버리는 이상한 풍습이 있다. "나라 힘이 딸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라며 스스로 비굴한 자세를 취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은 동시에,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겪게 되는 피해들에 대해서도 대부분 '당연한' 입장을 취한다. 꼬우면 니네도 국력 키워라...

하지만 이런 인식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은근한 형태로 각인돼있는 게 사실이다. 비록 직접적으로 표출되는 경우는 적더라도 말이다. 실제로 동남아 출신의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서 엽기적인 인권침해에 시달려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에구..안타깝지만 나라가 못사니 어쩌겠노"라는 말 한마디로 고개를 돌려버릴 뿐이다.

...나도 어른이 되고 머리가 굵어지기 전까지는 이런 '은밀한' 인식에 사로잡혀 있었고, 국내에서 후진국 출신의 외국인들이 당하는 피해들을 은근히 당연시하는 자세를 갖고 있었다. 그랬기에, 앞의 필리핀 외교관은 너무나 멋지면서도 파격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뭐랄까...

"이야~~ 우리보다 훨씬 못사는 필리핀의 외교관이 우리나라에서 어쩜 저렇게 과감한 법집행을 할 수 있을까? 절라 멋지다!"

이 정도?

여튼...아마 나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해자가 같은 한국인이라도 피해자가 선진국 사람이냐 후진국 사람이냐에 따라 실제 법 집행은 철저히 다르게 진행된다는 사실...우리 모두가 다 현실적인 경험으로써 '당연하게' 인식하고 있다.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 독일에서 온 사람들이 한국에서 큰 범죄를 당하면 응당 크게 부각이 되는...그런 우리나라였다. 


그래서 나는 사실 선진국 출신의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당하는 범죄 사례가 어느 정도인지 거의 알지를 못했다. 그냥 선진국 출신이면 자기나라 대사관의 힘도 셀 테니까 보호도 알아서 잘 받겠지, 하는 정도의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현실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잘사는 나라 사람들은 못사는 나라 어디를 가도 무서운 것 없이 활개치고 다닐 수 있을 것이라고.

이랬던 나의 고정관념은 며칠 전에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한국인들도 인제 나라가 강해져서 무서운 게 없는지...범죄 대상에 선진국 후진국을 안가린다. 물론 선진국이냐 후진국이냐를 떠나서 범죄라고 하는 것은 전세계 어디에나 있는 것이지만, '사후처리' 과정에 있어서 시대가 변했구나 하는 걸 느끼는 때가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며칠 전 [미녀들의 수다]에서 미국인 패널 윈터 레이몬드가 자신이 한국에서 당했던 끔찍했던 강도 사건을 토로했다. 얼마 뒤 그녀는 자신의 미니 홈피에 구타당한 직후의 충격적인 사진을 올렸고, 이는 다시 인터넷 기사로 작성돼 네티즌들의 엄청난 공분을 샀다. 

...윈터 레이몬드의 이 불행한 경험은 내게 굉장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국의 영원한 '큰형님'인 미국에서 와도 이젠 신변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한국인들이 숭상해마지 않는 '백인'이었는데 말이다. 만약 한 이삽십년 전 같았으면...젊은 미국인 여성이 한국에서 범죄를 당했다고 하면 사건 처리가 지금보다는 훨씬 신속하게 처리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윈터 레이몬드는 자신이 피해를 당한 직후 경찰과 병원에서 피해자의 상태는 전혀 고려치 않는 방만한 일처리 때문에 더 큰 상처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충격이다. 이제 초강대국 미국도 겁내지 않는 한국 경찰, 한국 병원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뭐 방글라데시나 캄보디아 이런 데서 온 사람들은...안봐도 비디오 아닐까?

자국민 보호에 관한 한 전세계 어떤 나라보다 철두철미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미국도...생각보다 일 똑바로 하진 않는 모양이다. 영어권 국가가 아닌 곳이면 당연히 자국민 보호에 더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인데...

그냥 너무 안타깝다. 그렇게 큰 정신적 충격을 겪고도 저렇게 귀여운 표정을 지을 수가 있다니... 슬픈 얘길 하면서 당사자의 사진을 올리는게 좀 무례하긴 하지만...그냥 현재의 밝은 저 모습을 향해 격려의 박수를 쳐주고 싶을 뿐이다. 제기랄...만약 우리 부모님께서 조금 더 젊으셨더라면 내게도 저만한 여동생이 있었을 것 아닌가.

사건을 겪고 난 직후 미국에 있는 가족들과 통화를 했을 것인데...가족들 심정이 어땠을까.

윈터가 문제의 사건을 당한 것은 대략 2년 전이었는데, 사건이 있은 지 얼마 뒤 그녀는 한국과 관련된 한 영문 사이트에 자신이 당했던 경험을 담담한 어조의 장문으로 올렸다. 다른 외국인 친구들이 한국에서 이런 일을 더 당하지 않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한국인 본인들에게도 이런 식의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주고자 자신이 당한 경험을 솔직하게 올린다고 했다.

"범죄는 전 세계 어디서나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사건을 가지고 굳이 한국만의 특수한 범죄인 것처럼 비약시킬 필요는 없다"...라고 말하는 인간들이 있다. 아가리를 확 찢어버리고 싶다.  

이런 부끄러운 사건의 공범자인 '한국인'이라서 부끄럽고, 또다른 공범자인 '남자'라서 부끄럽다.  

윈터 양은 사건 있은 후의 후유증과 짧지 않은 입원기간으로 인해 학원강사 자리까지 잃었다고 했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 한국을 처음 방문하여 비교적 자주 왕래를 하였으며, 현재도 계속 여기서 머물고 있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할 것이다. 헌데 그녀가 사랑을 쏟아부은 한국, 그 나라는 그녀에게 어떻게 대접을 해주었나. '강도질'로 대접을 했다...

그래도 윈터는 아직 여기에 남아 있다. 2년 전의 충격을 혼자서 치료한 채로,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한국인들 앞에 서 있다. ㅠ.ㅠ 

윈터 양은 그래도 미국 사람이고 영어를 쓰니 망정이지. 힘도 없고 영어도 안쓰는 그런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도대체 한국에서 범죄를 당하면 어디에다 하소연을 하고 어디에다 분풀이를 할까.  

윈터 양에게 파이팅을 보내며...그간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이 끔찍한 피해를 당했을 다른 외국인들에게도 심심한 묵념을 올린다. 그리고 내 자신은 그간 나보다 약한 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경험은 없는지...진심으로 반성해 본다.

by 냄비국물 | 2007/11/15 01:08 | 日常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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