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18일
고양이를 부탁해. 여성 속으로 뛰어들다...
'존 말코비치 되기'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다. 색다른 시각의 주제를 헐리우드의 연기파 배우들을 통해 위트있게 그려냈던 명작. 거기서 주인공들은 존 말코비치의 몸 안으로 들어가 그의 행동과 사고방식, 정서 따위를 훔쳐읽는 행운을 누린다.
영화관에서건 골방 침대 위의 노트북에서건, 난 일년에 영화를 두 편 이상 안본다. 오늘 하루도 영화 안본지가 대충 7~8개월은 되는 것 같아서 하나 봐보기로 했다. 그냥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제목이 떠올라 그걸 구해서..봤다. 대충 시놉시스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름 괜찮아 보였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기대 이상의 수확을 올렸다. '존 말코비치 되기'의 주인공들 처럼 다른 사람의 몸과 정신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그 시각만큼은 얼마간 읽어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인 나로서는 그간 전혀 몰랐다고 했어야 마땅할 여자들의 시각, 그리고 정서. 영화를 본 후의 느낌은, 여자들의 정서는 무척 '섬세하다'는 것이었다. 너무 뻔한 결론인가. 어쩌면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정서가 '섬세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뭐 어찌됐건...이래저래 색다른 질감을 안겨준 작품이라 내 기억에 꽤 오랫동안 새겨져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정재은 감독 작품으로 2001년 10월에 개봉했다.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로 감상을 했는데...결과적으로는 모든 게 다 예상대로였다. 총감독인 정재은씨가 시나리오를 직접 썼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완성도의 측면에서 가장 큰 점수를 주고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 편집을 도맡으면 내러티브의 흐름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무장한 감독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들. 어찌보면 후질근하다고도 할 수 있을 인천항과 그 근방 빈민촌의 모습을 감독은 무척 쓸쓸하면서도 부드러운 톤으로 그려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러가지로 매력이 많았다. 현실을 솔직하고 수수한 터치로 그려내면서도 욕한마디 들어가지 않았다. 남자의 ㄴ자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 부분이 너무 좋았다. 영화의 홍보 문구에 있던 '스무살...섹스 이외에도 궁금한 것은 많다...'는 말. 남자로서 스무살 때의 내 상태를 고백해보자면, 솔직히 이런 식의 절실한 고민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아마 대학이라는 온실 속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앞날에 대한 고민 따위는 모조리 하루 저녁의 술잔 속으로 녹아 사라질 뿐이었다. 이 영화의 스토리가 전개됨에 있어서 '사회'라는 장치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갑옷도 칼도 없이 전쟁터로 내던져진 존재들. 고뇌는 필연이다.
조폭 양아치 영화의 뻘밭에서 이런 연꽃 같은 아름답고 청결한 영화가 나오다니...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축복이다. 솔직하면서도 섬세한 튠, 그러면서도 현실과 꿈이라는 인생의 복잡한 실타래를 품위있게 펼쳐보이는 센스... 뭐 '여성들의 로망' 정도라고 하면 되려나? 로망이라는 단어가 무진장 남성적이고 징그러운 어감을 주긴 하는데 적절한 어휘를 못찾겠다. 여튼...여자들이 이렇게 차분하고 섬세하면서도 또 신사적이기 그지 없는...그런 영화를 찍고 있을 때...잘나신 우리 대한민국 남자 감독분들은 뭘 하셨을까.
욕이 없으면 도무지 영화를 만들 줄 모르는 종자들. 자기 먹고 싶은데로 처먹어놓고 악취나는 똥이 나오면 그걸 두고 '더러운 현실'이라며 자기는 그 현실에 충실한 리얼리스트 작가라고 스스로 떠들어댄다. 정말이지 매순간 입냄새가 진동하는 놈들이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이자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그려진 이 영화에서..주인공 배두나는 유치장 밖으로 나오는 친구를 맞으며 이런 멋진 말을 한다.
"어디로 갈건데?"
"가면서 생각하지 뭐.^^"
이 대화가 너무나 가슴에 와닿아 나는 잠시 영화를 스톱 시키고 그 대사 부분을 메모를 했다. 그리고 다시 플레이를 시켰는데...영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음...하하. 나도 이제 영화 좀 볼 줄 알게 된 걸까? 영화에서 제일 의미심장하달 수 있는 대화를 본능적으로 캐치해냈으니 말이다. ㅋㅋ

개는 자신의 주인과 주종 관계를 이루지만, 고양이는 자신의 주인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친구로 대한다. 때로는 살다가 주인이 맘에 들지 않으면 나가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언제나 스스로 모험을 하면서 살아간다.
어쩌면...그동안 남자들은 자기 자신을 세뇌시켜면서 살아왔던게 아닌가 생각된다. 힘이라는 그 따분하기 그지 없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말이다. 떡줄 사람은 맘에도 없는데 김칫국만 마시는 자칭 '남자'들. 그들에게 영화 제작을 맡겨 보았다. 어떤 영화가 나왔나.
'고마해라...마이 뭇다이가...'
이걸 '로망'이란다.
남자들은 자신들의 섬세한 본능을 스스로 짓누르는 희한한 억압기제를 가동시키고 있다. 남자는 좀 귀엽고 조용하게, 차분차분하게 살면 안되는 건가? 남자라면 언제 어디서나 같은 수컷을 쓰러뜨리고 승리의 포효를 내뿜어야 하는 것인가? 양 팔에 암컷을 잔뜩 끼구서 말이다.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묘사되는 스무살 여자들의 모습이 대한민국 여성들의 일반적인 군상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대 영화로 비교하자면, 정재은씨의 이 영화는 십원짜리 욕으로 똥범벅이 돼있는 남자 감독들의 영화보다는 백만 배는 더 어른스럽다.
정재은 감독. 인간적으로 내공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 영화 자체는 저렇게 섬세하지만...그것을 만드는 과정은 전혀 섬세할 수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작품의 통일성과 완성도를 꾀하기 위해...스텝들과 수많은 갈등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흔적은 전혀 남기지 않고...자신의 초심을 큰 무리 없이 하나의 완성품으로 잘 빚어내었다. 물론 감독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공이다. 이 영화의 위대함은.
역시 영화는 가끔씩 봐야 제 맛이다. 문득 떠오르게 되는 영화들.
제기랄...오늘 하마터면 삼백 볼뻔했다.
깬다 정말...삼백이 뭐냐 삼백이...ㅋㅋㅋㅋㅋㅋㅋ
# by | 2007/11/18 13:54 | Mental Beauties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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